영동군 심천면 난계사, 난계국악박물관 다녀가기

2017. 3. 20. 17:39일상

반응형

시골집을 가다 아이들과 잠깐 난계사에 들렀다.

첫아이 4살때인가 한번 들렀었는데 큰아이가 벌써 11살이다.

시간이 참 빠르다. 그땐 한창 제비꽃이 피던 계절이었으니 지금보다 조금 늦게 찾아왔나보다.

우리나라 3대악성 박연선생을 모신 사당이자 나의 조상이다.

직계조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국당할아버지의 사촌형제이셨던 난계공파 박연할아버지 이시다.

 

 

딸아이에게 내가 아는 지식을 아이에게 알려주니

박연할아버지에 대해서 책에서 읽었다고 말을한다.

 

 

 

난계사 안쪽으로 들어가면 길 옆으로 잔디밭이 있다.

어릴적 이곳으로 소풍을 오곤했다.

초등학교때, 중학교때 두세번은 이곳으로 소풍을 온기억이 있다.

한두시간씩 걸어서 이곳까지 와서 재미있게 놀던 추억이 떠올랐다.

 

 

사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박연 할아버지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난계사 현판이 걸려있다.

난계사는 충청북도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어있다고 한다.

기념물이어서 혹시모를 일에 대비해서 CCTV가 돌아가고 있었다.

 

 

딸아이가 4살때 이후로 다시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ㅎㅎㅎ 6~7년만에 다시 찾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낯설지 않다고 한다.

 

 

딸아이는 휴대폰으로 사진도 찍고 하는데

아들녀석은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바쁘다.

결국 도랑으로 넘어졌다. ㅎㅎ

다행히 낙엽이 두껍게 쌓이곳이라 다치지는 않았다.

 

 

나오는길 다시한번 사당족을 찍어봤다.

 

 

난계사 입구 바로 옆에는 난계국악박물관이 있다.

입장료가 있었지만 아이들에게 보여줄겸 들어가 봤다.

다른곳은 사진촬영이 안된다고 안내문에 쓰여있기에 사진은 찍지 않았다.

딱 한군데 포토존이 있어서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국악박물관 옆에는 난계국악기제작촌과 건너편에는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이 있다.

 

 

국악기제작촌 앞에있는 북을보고 아들녀석 달려간다.

한번씩 손으로 쳐서 울려보니 소리가 웅장하다.

 

열정적으로 치는 아들녀석 동영상으로 찍어봤다.

 

 

딸아이도 한번 쳐보라고하니 소심하게 통통거린다.

 

 

이녀석 많이 의젓해 졌다.

어릴적에는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녔는데.

 

 

급하게 돌아보고 10분거리의 시골집으로 향했다.

 

 

 

난계사

 

난계 박연의 사당이다. 난계사는 양산팔경을 빚고 내려온 금강 줄기가 영동땅을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둥그렇게 휘감기는 심천면 고당리 고당교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세종 때 음악이론가로 크게 활약한 박연은 거문고를 잘 탄 왕산악, 가야금을 잘 탄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의 한 사람이다.

 

난계사왕산악,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난계 박연을 모신 사당이다.

박연은 이곳 고당리에서 고려 우왕 4년(1378)에 나서 조선 세조 4년(1458)에 여든한 살의 나이로 죽었다. 태종 5년(1405)에 생원, 태종 11년에 진사에 등과한 후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쳤다. 세종 즉위 후에는 『관습도감』 제조에 임명되어 음악 분야에 전념, 우리나라 음악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향악과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 및 악기의 그림을 실은 악서를 편찬하였으며 각종 아악기를 제작하고 ‘조회악’이나 ‘회례아악’을 창제하였으며 종묘악을 정돈하는 등 국악 전반에 미친 그의 업적은 지대하다.

특히 국산 편경을 만든 것은 그의 큰 공으로 꼽힌다. 편경은 두께가 각각 다른 기역자 모양의 경돌 16개를 아래 위 두 단으로 매달아 두드리는 가락 타악기이며, 온도와 습도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으므로 모든 다른 악기 조율의 기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11년(1116)에 송에서 편경을 들여와 썼고 공민왕 때와 조선 태종 때도 명으로부터 편경을 들여와 궁중 제례악에 썼다. 그러나 세종 때 경기도 남양에서 경돌을 발견함으로써 국산 편경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박연의 벼슬은 공조참의, 중추원사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등 단종의 측근 대신들을 없애고 실권을 잡은 계유정난 때 아들 계우가 처형되면서 박연도 파직되었다. 이후 박연은 고향으로 내려와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8호인 난계사는 1973년에 건립되었으며 돌계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 솟을삼문과 담장으로 이루어졌다. 사당 안에는 박연의 영정이 봉안되었고 그의 후손들이 향사하고 있다.

영동군에서는 1968년부터 해마다 난계예술제를 열고 있다. 난계예술제는 국악공연과 농악시연, 가장행렬 등으로 시작하여 난계사를 참배하고 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나 전국시조경창대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등 각종 대회와 전시회가 열리며 민속놀이·농악경연, 백일장, 미술대회, 문학의 밤까지 벌어지는 종합 예술제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난계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2 - 충북, 초판 1998., 6쇄 2003., 돌베개)

 

반응형